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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암태도 소작쟁의 신안문화원 2006/3/23 8819


    암태도 소작쟁의

    1928년 8월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암태도를 묘사했다.

    암태도의 호구는 약 1,300호였고, 인구는 약 7천 명 정도였다. 암태도의 토지는 비옥하고 농산물도 비교적 풍부하며, 어업을 부업으로 하는 집이 많았다. 소작료는 모두 4할이고 대금 이자는 2분 5리가 최고이며 토지는 전부 도민의 것으로 외지 사람, 더욱이나 일본인의 소유는 寸土도 없으므로 일반 도민의 생활은 안정하고 풍족하다 한다. 4년 전의 암태소작쟁의는 아직도 세상 사람의 기억에 새롭거니와 조선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는 이것이 효시라 한다. 희생자 백여명, 쟁의자금 만여원이라는 것을 보면 얼마나 큰 사건이었던 것을 넉넉히 연상할 수 있다 한다. 그 이전에는 지주가 7할, 대금업자가 5分 내지 대동(倍)변을 받았다 하니 이 소작쟁의의 효과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년래로 도민들이 어찌나 단결이 되었든지 일본인 재벌이 들어와서 다른 섬과 같이 토지를 살려고 4,5차나 계획하다가 번번히 실패를 하였다는데 이것은 도민들의 자각으로 외래 재벌을 절대 배척하고 팔더라도 그 섬안에서만 서로서로 매매됨으로 외지 사람은 발을 붙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동리마다 농민야학이 있어 남녀로소 할 것 없이 모두 배우므로 국문 편지 한 장씩은 다 볼줄 알며 쓸 줄도 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곳에는 문맹타파운동같은 것은 벌써 시대에 뒤떨어진 운동이라 한다.
    이같이 이 섬만이 다도해 섬 중에서 제일 먼저 각 방면으로 깨이게 된 원인을 찾아보면 지금으로부터 8년 전에 유지 몇 분의 발기로 암태사립학교란 학교를 설립하여 3백여 명의 총준자제를 보통 정도로부터 중등정도까지 길러내어 그 청년들이 각 방면으로 활동하여 농민운동에도 전위분자가 되었으며, 문맹타파운동에도 선봉이 되었다 한다. 다도해 방면 다른 섬에서는 이 섬을 가리켜 이상향이라고 부른다. 흡사히 중국혁명에 황포군관학교가 원동력이 된 것과 같이 암태사립학교는 암태의 오늘이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한다. 오 위대한 교육의 힘이여.(ꡔ동아일보ꡕ 1928.8.15)

    ‘다도해의 이상향 - 암태도’는 당시 서남해안에서 가장 선진적인 섬이었다. 그러한 암태도를 만든 것은 앞서 본 것처럼 1920년에 설립된 암태사립학교의 교육의 결과와, 1924년에 있었던 소작쟁의의 결과였다. 1924년의 암태소작쟁의는 우리 나라 소작쟁의의 효시를 이룬 것인데,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암태도에는 지주가 여럿 있었지만 가장 큰 지주는 문재철(文在喆)과 천후빈(千后彬)이었다. 천후빈은 5백석 정도를 하는 지주로서 다른 지주에 비해 소작료를 낮게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소작인들이 자선불망비를 세워줄 정도로 인심을 얻었으나 문재철은 그렇지 않았다. 암태도에서 소작인회가 만들어진 것은 1924년 1월경이었다. 소작인회는 창립 당시 논의 소작료는 4할, 밭의 소작료는 3할로 하기로 하고, 이를 지주들에게 통고하여 많은 지주들의 승낙을 얻었다. 소작인회는 그해 4월 2일 제1회 479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정기총회에서 만약 지주가 그 조건을 승낙치 아니하는 경우에는 소작인은 불납동맹을 실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이틀 뒤 소작회 간부 서태석과 박종유, 서동오 3명은 지주 문재철의 종제되는 문응창 문응호 등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3명은 이에 진단서를 첨부하여 광주지법 목포지청에 고소를 제기하였는데, 문재철 편에서도 역시 거짓 진단서를 첨부하여 고소를 제기하였다. 4월 16일 목포지청검사국과 목포경찰서는 암태도에 들어가 소작분쟁 문제를 조사한 뒤 소작회 간부인 서태석과 서광주, 박필선 등 3명을 연행, 목포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이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소작회 간부 모두 13명이 구속되었다. 이에 회원들은 6월 5일 면민대회를 열고 청년회 대표 박복영, 소작회 대표 김용학, 부인회 대표 고백화 3명을 비롯한 면민 4백여 명이 범선 7척을 나누어 타고 목포경찰서로 몰려갔다. 이들은 그날 밤 경비소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에는 광주지법 목포지청 구내에 몰려갔다. 이에 예심판사가 대표를 불러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해산하지 않고 수감된 간부들을 만나기 위해 목포형무소로 몰려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법원 지청, 목포 부청 등을 돌면서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부청측에서 대표 2명만 남고 군중은 일단 해산하라고 종용하여 결국 도민들은 7일 아침 일단 해산하고 귀도하였다. 그러나 소작회 간부 13명은 모두 예심을 거쳐 7월 3일 소요 및 상해죄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은 암태면 기동리의 서태석, 박홍원, 박응언, 서동수, 서창석, 서민석, 김연태, 손학진과 단고리에 사는 박필선, 박병완, 김운재, 박용산, 김문철 등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암태도민 6백여 명은 7월 8일 배를 타고 목포로 들어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쇄도하였다. 이들은 이번에 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그대로 법정 안에서 굶어죽자는 결의를 하고 몰려온 것이었다. 이에 지청장, 경찰서장은 대표 서광호, 박복영 등을 만나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군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날 밤 법원 지청 마당에서 “대지를 요로 삼고, 창공을 이불삼아” 밤을 세웠다. 이들 군중 가운데에는 백발의 70노파와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법원지청에서 사흘째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몇몇 사람이 혼절하여 졸도를 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암태도민의 아사동맹 농성이 4일째에 이르자 동아일보등 도하 신문들은 이 사건을 대서 특필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김병로, 김용무, 김태영 변호사와 광주의 서광설, 목포의 김영수 변호사등이 변호를 자처하고 나섰다. 또 서울 경운동의 천도교당에서는 14일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 주최로 암태소작쟁의 동정연설회가 열렸다. 또 서울의 건설사라는 사상단체에서는 암태소작쟁의 동정금을 모금하였다. 대구에서는 노동공제회 등 3단체가 동정금을 모아 보냈다. 경남 고성군에서도 동정금을 모아 암태소작인회에 보냈다.
    이 사건의 공판은 광주지법에서 9월 1일 열렸다. 검찰측은 이 사건은 단순한 소작쟁의가 아니고 그 뒤에는 사상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각각 징역 6개월을 구형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암태소작회와 문재철 지주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협상은 광주노농회 간부 서정희와 전남경찰부 고등과장 고하(古賀), 목포경찰서장 등이 조정한 것인데, 지주 문재철은 소작회 측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주기로 하였다. 문재철은 소작회에서 요구한 논 4할 소작료율을 받아들였고, 소작회는 1923년에 미납된 소작료는 3년 동안에 나누어 지주에게 납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구금중에 있던 소작회 간부 13명과 지주측 2명에 대해서는 쌍방에서 서로 고소를 취하하여 석방운동을 하여 이들은 대부분 언도 판결을 거쳐 일단 집행유예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서태석은 대구 복심법원에서 3년을 언도받고 1927년 3월 만기 복역을 하게 되었다. 또 서창석은 징역 1년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대구복심법원에서도 같은 형을 받았으며,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당하여 1년간 복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분적인 희생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암태소작쟁의는 소작회측의 승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소작회측과 지주측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문재철은 소작회측을 액화시키기 위해 자기 친족 및 관계자 등으로 소작상조회와 교육협회를 조직하여, 암태소작회와 암태청년회측과 대립하게 하였다. 양측의 대립은 1925년 4월 충돌로 이어져 청년회 간부 손학진, 박응언, 김세중, 김정순, 박금담, 이권익 등은 협박공갈상해라는 죄명하에 구속되어 목포지청에서 징역 6월 내지 8월을 언도받았다. 특히 박응언은 집행유예 중이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취소 당하여 6개월을 더 복역해야 하였다.
    1926년 암태소작인회는 암태농민조합으로 개편되었다. 이들은 각 리에 조직된 노농단을 농민단으로 변경하고, 소작권의 영구 보존, 소작료의 답 4할 전 3할 이내, 지주의 무리한 계약은 절대 거절할 것, 소작료 운반은 1리 이상은 임금을 요구할 것, 리에는 야학을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암태농민조합은 이후에도 타지역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한 조직력을 갖고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그러한 조직력이 앞서 본 ‘다도해의 이상향, 암태도’를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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