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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도초면] 도초면 문화유산 신안문화원 2008/2/12 6305


    [도초면] 도초면의 문화유산
    출처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8 《신안군문화유적분포지도》 신안군

    1. 新安 發梅里 崔鶴圭不忘碑ㆍ崔基鍾紀蹟碑 (신안 발매리 최학규불망비ㆍ최기종기적비)
    소 재 지 : 도초면 발매리 화도마을
    시 대 : 1888ㆍ1948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화도선착장에서 마을 쪽으로 들어가면 지금은 쇠락한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비가 위치한 곳은 선착장에서 남서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야산(68.7m) 끝자락으로, 2개의 비가 도로보다 5m 정도 높은 위치에 세워져있다. 1기는 ‘崔鶴圭不忘碑’, 1기는 ‘崔基鍾紀蹟碑’이다.
    崔鶴圭不忘碑 : 최학규의 善政을 기리기 위해 1888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光陽縣監崔公鶴圭永世不忘碑’라고 새겨져 있고, 공의 행적에 대해서 4언 절구로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67㎝, 너비 55㎝, 두께 21㎝이다.
    崔基鍾紀蹟碑 : 선생의 字는 羽鉉, 본관은 경주이다. 아버지 崔星七과 어머니 파평윤씨 사이에서 1874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孤雲先生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經史에 능통한 문장가였다. 면암 최익현은 그를 “학식과 덕행이 높아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했다. 이러한 선생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門人들이 1948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앞면에는 ‘雲軒慶州崔先生羽鉉紀蹟碑’ 라고 새겨져 있고, 측면에 아들과 동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의 뒷면에는 15행 39자로 선생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朴柱亨이 撰하고, 林哲周가 書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35㎝, 너비 44㎝, 두께 18.5㎝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2. 新安 發梅里 南一井 (신안 발매리 남일정)
    소 재 지 : 도초면 발매리 발매마을
    시 대 : 1930년
    종 류 : 생활유적
    유적현황 : 마을 입구의 논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우물의 건립연대는 1930년 1월 23일이며,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상단부는 장대석을 이용하고 그 아래로는 장대석과 다듬은 판석형의 석재를 이용하여 결구하였다. 규모는 가로 180㎝, 세로 180㎝, 높이 65㎝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 新安 發梅里 김창단家屋 (신안 발매리 김창단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발매리 1183(발매마을)
    시 대 : 1900년대 초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마을회관에서 좌측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건립연도는 1900년대 초이다.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모방ㆍ정지ㆍ안방ㆍ마래ㆍ헛간을 배치한 단순한 형태로 되어있다. 이 가옥의 특징은 마래 옆으로 1칸의 헛간이 설치 된 점이다. 또한 모방이 정지 전면 쪽에 있지 않고 측면에 가는 형식도 특징적이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모방이 상당히 독립적이고 출입을 전면 툇마루를 통하게 되어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4. 新安 發梅里 尹碩俊紀念碑 (신안 발매리 윤석준기념비)
    소 재 지 : 도초면 발매리 발매마을
    시 대 : 1947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이 비는 발매마을 안쪽 끝자락에 위치하는데 마을회관에서 좌측으로 100m 정도 떨어져 있다. 비의 전면에 ‘善士坡平尹公碩俊紀念碑’라 새겨져 있으며, 행적이 4언 절구로 기록되어 있다. 윤석준(尹碩俊)은 사재를 희사하여 마을 주민들의 공동우물을 설치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발매마을 주민들이 1947년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30.5㎝, 너비 48.7㎝, 두께 19.7㎝이다. 비의 기단에 문인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담장시설과 옥개석을 새로 하였다. 기존의 옥개석은 따로 앞에 놓여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5. 新安 發梅里 文根則紀行碑 (신안 발매리 문근칙기행비)
    소 재 지 : 도초면 발매리 발매마을
    시 대 : 1948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춘경마을에서 발매마을로 들어가는 중간지점의 산자락에 위치하는데 발매마을 초입부에 해당한다. 비의 전면에는 ‘南崗先生文根則紀行碑’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선생의 행실에 기록한 비문(14행 20자)이 새겨져 있다. 公은 품성이 온후하고, 행실이 바르며 학문을 장려하였다. 이에 공의 문하생들이 스승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948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비문은 문인 咸陽 朴珠亨이 撰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28㎝, 61.5㎝, 두께 20㎝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6. 新安 發梅里 春耕空家 (신안 발매리 춘경공가)
    소 재 지 : 도초면 발매리 267(춘경마을)
    시 대 : 191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발매리 춘경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다. 건립연도는 1910년대이다.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마래ㆍ안방ㆍ정지ㆍ모방ㆍ소청을 배치한 형태로 되어있는데 모방이 정지 측면에 배치된 일자형 평면구조이다. 이 유형은 전남 남해도서(완도군)에서 주로 보이는 구조이다. 모방이 정지 전면 쪽에 있지 않고 측면에 가는 형식이다. 모방이 상당히 독립적이고 출입을 전면 툇마루를 통하게 되어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7. 新安 發梅里 김담이家屋 (신안 발매리 김담이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발매리 198(춘경마을)
    시 대 : 193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발매리 춘경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건립연도는 1930년경이다. 전면 7칸으로 규모가 크다. 정지가 무척 크고 우측으로 평면구성이 다양하다. 평면형태는 좌로부터 고방ㆍ마래ㆍ안방ㆍ정지ㆍ모방ㆍ갓방ㆍ마루를 배치한 일자형 평면구조이다. 이 가옥의 특징은 모방이 정지 안쪽으로 반쯤 침투되어 있어 완전한 ‘一’자형을 이루고 있다. 상대적으로 정지공간이 축소되는 반면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가고 있다. 현재는 주인이 집을 비워 관리가 되어 있지 않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8. 新安 指南里 朴道弘紀行碑 (신안 지남리 박도홍기행비)
    소 재 지 : 도초면 지남리 지남마을
    시 대 : 1945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지남마을에서 원발매마을로 넘어가는 도로 우측 밭둑길에 위치한다. 이 비는 朴道弘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45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愚齋密陽朴先生紀行碑’ 라고 새겨져 있다. 비의 뒷면에는 10행 27자로 金容銓이 識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33㎝, 너비 44㎝, 두께 20㎝이다.
    참고문헌 : 신자료

    9. 新安 指南里 指南祭堂 (신안 지남리 지남제당)
    소 재 지 : 도초면 지남리 지남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현황 : 지남리에서는 음력 정월 15일과 7월 15일에 당제를 지냈다. 지남리는 지남, 지북, 지동, 죽동이 포함된 구역명칭으로, 지남리에 속한 모든 마을이 함께 지내는 당제는 ‘도지’또는 ‘천제’라는 명칭으로 불리었으며, 정월 보름에 지내는 당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으로, 상당제, 중당제, 하당제로 구분되어 있다. 상당제는 ‘천제’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중당제와 하당제는 구체적 신격이 전하지 않는다. 천제를 지내는 상당은 마을 뒷산 정상부에 있는 소나무로, 소나무 밑에는 당집이 마련되어 있어서 제를 진행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현재 당집과 제물을 준비하던 절구통 등이 남아 있으나, 당집은 슬레이트 지붕이 붕괴되는 등 폐허가 되어있다. 중당은 마을로 내려오는 중간지점으로, 현재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하당은 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자리로, 예전에는 큰 소나무들이 있었다. 제의 진행은 14일 밤 10시경에 시작하여, 상당에서 천제를 지내고, 마을로 내려오는 비탈길에서 중당제를 지낸 후, 현 마을회관 자리로 이동하여 하당제를 지낸다. 당제는 10~20여년 전에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10. 新安 指南里 金權益紀行碑ㆍ金仁遺蹟碑 (신안 지남리 김권익기행비ㆍ김인유적비)
    소 재 지 : 도초면 지남리 지동마을
    시 대 : 1946ㆍ1948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도초서초등학교에서 101번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지동마을이 나온다. 지동마을의 정미소 왼편에 비 2기가 서 있다. 1기는 ‘金權益紀行碑’이고, 다른 1기는 ‘金仁遺蹟碑’이다.
    金權益紀行碑 : 김권익의 호는 隱湖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公은 金文起의 후예이고, 金贊文의 아들이다. 공은 덕행, 功業, 문장을 숭상하였는데, 이것이 덕을 실천하는 근본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비는 선생의 문인들이 스승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1946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의 전면에 ‘隱湖居士慶州金權益紀念碑’라 새겨져 있다. 비의 뒷면에는 咸陽 朴珠亨이 撰한 비문(10행 28자)이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25㎝, 너비 49.5㎝, 두께 24.5㎝이다.
    金仁遺蹟碑 : 선생의 字는 振旭, 號는 愚堂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선생은 도초면 지남리에서 태어났다. 마을에서 후진을 양성하는데 활약하였다. 이 비는 선생의 문인들이 1948년에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 ‘愚堂慶州金先生遺蹟碑’라 새겨져있고, 비의 뒷면에 선생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12행 34자)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박준일이 撰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40㎝, 너비 52㎝, 두께 25㎝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11. 新安 外南里 고자례家屋 (신안 외남리 고자례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외남리 838(외상마을)
    시 대 : 1845년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외남상리 천주교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건립연도는 상량 ‘道光二十午年乙巳…’로 보아 1845년으로 보인다. 가옥의 평면구성은 좌로부터 마래ㆍ안방ㆍ정지ㆍ사랑ㆍ모방 순으로 배치된 일자형 구조이다. 또한 좌․우측에 툇간을 두었다. 이 가옥의 특징은 모방이 정지 전면 쪽에 있지 않고 측면에 가는 형식이다. 모방이 상당히 독립적이고 출입을 전면 툇마루를 통하게 되어있다. 현재는 집이 비워있으며 원래의 주인은 바로 옆집에서 살고 있다. 원래는 고상례가옥이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확인결과 성명이 고자례인 것으로 확인되어 정정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12. 新安 外南里 外上石長栍 (신안 외남리 외상석장승)
    소 재 지 : 도초면 외남리 외상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거석기념물ㆍ민속유적
    유적현황 : 외상마을 어귀 속칭 ‘빗턱골’ 왼편에 석장승 1기가 서있다. 높이 240cm, 폭 45cm, 폭 25cm로 큰 갓의 모자를 쓰고 손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창을 잡고 있다. 긴 얼굴의 상부에 타원형의 눈이 있고, 눈동자를 박아 놓았던 구슬이 빠지고 그 자리가 패여 있으며, 입은 한일(一)자로 벌어져 치아들이 모두 드러나 있다. 가슴은 벌거벗은 듯하고 좌우로 사선이 7줄씩 음각되어 있어 갈비뼈를 묘사한 듯하다. 이 석장승은 마을 청년들이 잇따라 사망하는 등 마을에 불상사가 겹치자 이러한 재앙이 마을 앞 발산마을 바위의 지나친 기에서 기인한다고 하여 그 기를 꺾고자 마을 주민들이 장승건립 기금을 모아 1946년 11월에 장승을 세웠다 한다. 장승의 기단부에 장승 건립에 기부한 사람의 명단과 창부(創夫)와 석공(石公)의 이름, 건립연대가 새겨져있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13. 新安 外南里 高祥珉不忘碑 (신안 외남리 고상민불망비)
    소 재 지 : 도초면 외남리 외하마을
    시 대 : 1939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외하마을 북동쪽의 밭가에 위치하는데 외상마을 뒤편의 산 남쪽의 하록부에 해당한다. ‘밀양박씨열녀각’과 함께 있다. 이 비는 고상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39년 4월 9일에 건립된 것으로, 비의 전면에는 ‘贈順陵參奉高祥珉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는 고상민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盧道基가 撰한 것이다. 규모는 높이 190㎝, 너비 45㎝, 두께 21㎝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14. 新安 外南里 密陽朴氏烈女閣 (신안 외남리 밀양박씨열녀각)
    소 재 지 : 도초면 외남리 외하마을
    시 대 : 1941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이 비각은 외남상리 천주교회 앞을 지나 외남하리로 향하는 도로변 좌측에 위치한다. 비각 바로 옆에는 ‘고상민불망비’가 있다. 이 비각은 밀양박씨부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41년에 건립되었다. 비각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이며, 석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비각 내부에는 밀양박씨부인의 열행을 기록한 비가 서있다. 비의 전면에 ‘節婦 密陽朴氏紀蹟碑’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이병관이 撰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60㎝, 너비 46㎝, 두께 15㎝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15. 新安 外南里 成覺寺址 (신안 외남리 성각사지)
    소 재 지 : 도초면 외남리 외하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사지
    유적현황 : 외하마을 북서쪽 산 중턱에 위치한다. 지금은 만덕사라는 사찰이 있으나 예전에는 성각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만덕사도 7년 전 화재로 소실되고 3년 전에 다시 건축하여 법당 1동과 칠성각 1동이 있다. 이외에 동종과 우물, 부처입상 2구가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16. 新安 外南里 김순안家屋 (신안 외남리 김순안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외남리 29(정두마을)
    시 대 : 193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김순안가옥은 정두마을로 들어서면 산사면 바로 아래에 있는 가옥이다. 안채와 행랑채로 꾸며진 전형적인 ‘ㄱ’자 배치로 모방이 정지 안쪽으로 드려진 ‘一’자형 가옥이다. 안채의 평면구조는 좌로부터 마래ㆍ안방ㆍ정지ㆍ모방 순이다. 건축연대는 193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옥의 특징은 모방이 정지 안쪽으로 반쯤 침투되어 있어 완전한 ‘一’자형을 이루고 있다. 상대적으로 정지공간이 축소되는 반면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가고 있다. 또한 모방이 다른 가옥에 비해 다소 크다. 행랑채는 일자형으로 좌로부터 소청ㆍ사랑방ㆍ대청ㆍ고방ㆍ헛간 순으로 배치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17. 新安 外南里 박명심家屋 (신안 외남리 박명심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외남리 216(정두마을)
    시 대 : 193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외남하리에서 북쪽으로 600m 정도 떨어진 곳에 정두마을이 있다. 정두마을은 비교적 높은 산(해발 128.2m)을 끼고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이 가옥은 정두마을로 들어서면 첫 번째로 나오는 가옥이다. 정지 옆으로 1칸의 소청이 설치되어있으며 안방 위쪽에 장반(수납공간)이 있다. 건립연대는 1930년경이다. 가옥의 평면구조는 좌측으로부터 차례로 고방ㆍ마래ㆍ안방ㆍ정지ㆍ모방ㆍ소청 순으로 일자형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좌로부터 나무청ㆍ사랑방ㆍ마래ㆍ헛간 순으로 배치하였다. 이 가옥의 특징은 모방이 정지 안쪽으로 반쯤 침투되어 있어 완전한 ‘ㅡ’자형을 이루고 있다. 상대적으로 정지공간이 축소되는 반면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가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18. 新安 外南里 최서운家屋 (신안 외남리 최서운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외남리 200-9(정두마을)
    시 대 : 194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김순안가옥 바로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건립연도는 1940년대로 추정된다. 가옥의 평면구조는 좌로부터 고방ㆍ마래ㆍ대청ㆍ안방ㆍ정지ㆍ모방 순으로 ‘一’자형 구조이다. 이러한 안방과 마래 사이에 1칸 대청을 둔 구조는 특징적이며, 다른 도서에서도 간혹 보이는데 건립시기는 주로 20세기 이후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19. 新安 五柳里 密陽朴氏事蹟碑 (신안 오류리 밀양박씨사적비)
    소 재 지 : 도초면 오류리 오류마을
    시 대 : 1924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비는 오류마을의 북서쪽 산끝자락에 위치하는데 마을의 초입부에 해당한다. 박씨의 본실은 밀양이며, 윤상래와 혼인하였다. 남편인 윤상래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으며, 45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죽자 박씨는 홀로된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이에 박씨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24년에 비를 세웠다. 비문은 최기성이 지었고, 김국전이 썼다. 비의 전면에는 ‘烈女淑夫人密陽朴氏事蹟碑’라 새겨져 있고, 비의 규모는 높이 200㎝, 너비 50㎝, 두께 20㎝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20. 新安 水項里 全州李氏烈行碑 (신안 수항리 전주이씨열행비)
    소 재 지 : 도초면 수항리 수항마을
    시 대 : 1930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수항마을 도초동초등학교 근처의 민가 앞에 위치하고 있다. 열녀 전주이씨는 李章鉉의 딸이며, 文鍾燮의 처이다. 부인의 나이 23세가 되던 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홀로 유복자를 낳아 기르며 가문을 지켰으며, 홀로된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그 후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조석으로 예를 다하였다. 이 사실을 기려 1930년 12월에 비를 건립하였는데 비문은 金國銓이 撰하였다. 비 전면에는 ‘文鍾燮妻全州李氏烈行碑’ 라 새겨져있다. 규모는 높이 200㎝, 너비 50㎝, 두께 20㎝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21. 新安 水項里 朴泰浩文行碑 (신안 수항리 박태호문행비)
    소 재 지 : 도초면 수항리 수항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도초면사무소에서 수항마을로 향하다보면 수항마을로 진입하기 직전 도로 오른편에 비가 서 있다. 公은 수항리의 촉망받는 선비였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열심히 하였고, 부모를 공경하고 효를 다하였다. 성장하여서는 松庵 金先生과 竹庵 盧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새로운 학문을 익혀 후진들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문인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이 비는 선생의 문하생 崔碩斗 외 14인이 선생의 덕행을 기념하기 위해 1946년에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珍隱居士密陽朴泰浩文行碑’라 새겨져 있다. 비 뒷면은 선생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이 있는데, 이 비문은 金龍擧가 撰하고, 李泰奎가 書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48㎝, 너비 53㎝, 두께 22.3㎝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22. 新安 水項里 金璟在不忘碑 (신안 수항리 김경재불망비)
    소 재 지 : 도초면 수항리 나박포마을
    시 대 : 1913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이 비는 도초면사무소에서 도초초등학교로 향하는 도로변 우측에 위치한다. 비 옆에는 ‘朴正允頌德碑’가 있다. 원래 면사무소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김경재는 1861년(철종12)에 김권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금부도사, 장사랑, 중추원 의관 등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 겸 자헌대부에 증직되었다. 公의 성품은 근면하고 온후하여 노약자와 가난한 자를 힘써 구휼하였다. 또 도초도에 흉년이 들어 섬 주민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자, 공이 섬 주민들의 조세를 대납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유림들의 모임인 대동사문회에서 공의 행적에 대해 포상하였고, 도초도 주민들이 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13년에 불망비를 건립하였다. 비 앞면에는 ‘議官金公璟在永世不忘碑’라 새겨져 있으며 공의 행실을 노래한 4언 절구가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69㎝, 너비 48㎝, 두께 19㎝이다. 관련유적으로 도초면 만년리 만년마을에 ‘김해김씨효열각’이 있다. 이 비각 안에는 ‘資憲大夫金公憬在紀念碑’(癸亥年)가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23. 新安 水項里 朴正允頌德碑 (신안 수항리 박정윤송덕비)
    소 재 지 : 도초면 수항리 나박포마을
    시 대 : 1940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이 비는 도초면사무소에서 도초초등학교로 향하는 도로변 우측에 위치한다. 비 옆에는 '金璟在不忘碑'가 있다. 공의 본관은 咸陽이며, 五恨 朴成乾의 후예이다. 비문에 따르면 “호남의 人士를 논하면서 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칭송하고 있다. 공은 가난한 섬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였다. 이에 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40년에 비를 세웠다. 비의 전면에는 ‘惠齋朴公正允頌德碑’라 새겨져 있다. 비 뒷면에는 8행 3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閔丙漢이 撰하고 尹相裕가 書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2㎝, 너비 63㎝, 두께 23㎝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24. 新安 水項里 弓項石長栍 (신안 수항리 궁항석장승)
    소 재 지 : 도초면 수항리 궁항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거석기념물ㆍ민속유적
    유적현황 : 궁항마을 앞에는 간척지와 사이사이 농수로가 형성되어 있다. 석장승은 2번 지방도 입구 농수로 근처에 누워있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50~60년 전에 마을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의 바위 형상으로 인해 마을에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해석에 따라 장승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승으로 인해 주민들이 화를 당한다는 해석도 있어 장승을 세워놓지 않고 눕혀 놓게 되었다고 말하는 주민도 있다. 장승의 전체 생김새는 가사를 걸친 스님의 형상이다. 규모는 길이 215㎝, 어깨너비 56㎝, 두께는 어깨 부분이 27㎝, 얼굴 길이 54㎝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25. 新安 竹連里 咸陽朴氏ㆍ昌原黃氏烈女碑 (신안 죽련리 함양박씨ㆍ창원황씨열녀비)
    소 재 지 : 도초면 죽련리 신교마을
    시 대 : 1926ㆍ1948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신교마을 초입에 2기의 비가 있다. 열부 함양박씨와 창원황씨를 기념하기 위한 비이다. 왼편에 밀양박씨의 기념비가 있고, 오른쪽에 창원황씨의 독행비가 서 있다. 그리고 주변에 낮은 돌담이 비를 둘러싸고 있다.
    열녀 함양박씨는 五恨公 朴成乾의 후예인 朴玉兼의 딸로 태어나 성장하여서 金海 金昌厦와 혼인하였다. 남편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단을 쌓아 놓고 밤낮으로 기도하였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박씨부인은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하고, 어린 딸을 양육하면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러한 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26년에 대동사문회에서 기념비를 건립해 주었다. 비 전면에 ‘烈女貞夫人咸陽朴氏紀行碑’라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는 대동사문회에서 지은 부인의 열행사실이 14행 34자가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77㎝, 너비 34.5㎝, 두께 24.5㎝이다.
    열녀 창원황씨는 善士 黃鶴彬의 딸로 비금도 신원리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도초도에서 거주하고 있던 金海 金蓮坤과 혼인하였다. 그런데 부인과 혼례를 올린 남편이 나이 20세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부인은 절의를 지켰고, 주민들은 이러한 부인의 열행을 널리 기리기 위해 1948년에 독행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節婦昌原黃氏篤行碑’라 새겨져있고, 비 뒷면에는 부인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 9행 22자가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33㎝, 너비 47㎝, 두께 17㎝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26. 新安 竹連里 永慕祠 (신안 죽련리 영모사)
    소 재 지 : 도초면 죽련리 신교마을
    시 대 : 1936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영모사는 김해김씨의 문중사우로 신교마을 맨 안쪽 산자락에 위치한다. 배향인물은 김용거이다. 공의 諱는 允永, 자는 士恒이다. 金馹孫의 후예이자 金泰建의 아들이다. 공은 후학들을 가르침에 충효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특히 冠婚喪祭의 예법을 중시하였다. 영모사는 재실 상량에 ‘崇禎紀元後六回甲丙子’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36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영모사는 외삼문이 ‘永慕門’이라 새겨져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재실이 철문과 붉은 벽돌로 건립되어 있다. 재실 안에는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편액 4기가 걸려 있다. 편액은 ①‘雲焦金公祠宇記’(壬申年, 盧道基 識), ②‘松菴金公祠宇記’, ③‘永慕祠儒林芳名錄’. ④‘儒林寄賻錄’ 등이다. 영모사의 제사는 신안군내에 거주하는 선생의 문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27. 新安 竹連里 金海金氏烈女碑閣 (신안 죽련리 김해김씨열녀비각)
    소 재 지 : 도초면 죽련리 신교마을
    시 대 : 1938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신교마을 도로 남쪽의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석조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비각 입구에는 팔작지붕의 출입문이 있고, 정면에 ‘烈孝門’이라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비각 내부에는 2기의 비가 서 있는데, 왼쪽의 비는 ‘烈婦貞夫人金氏事蹟碑’이고, 오른쪽은 ‘孝婦淑夫人金氏陪行碑’이다.
    열부 정부인 김해김씨는 儒業 金正昌의 딸로 태어나 郎州 崔達雄과 혼인하였다. 김씨부인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일남일녀를 양육하면서 가문을 지켰다. 이러한 부인의 열행이 널리 알려져 경성 모성회에서 열녀로 포상하였다. 이에 1938년에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비 뒷면에는 金龍擧가 撰한 비문 12행 21자가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19.5㎝, 너비 43㎝, 두께 15.1㎝이다.
    효부 숙부인 김해김씨는 金光産의 딸로 태어나, 장성하여 五衛將 崔章淑과 혼인하였다. 김씨부인은 三從之道를 百行의 근본으로 삼았다. 김씨부인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 혼인하여서는 시부모님을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이러한 열행이 널리 알려져 모성회에서 열녀로 천거하였다. 비 뒷면에 부인의 열행사실이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11행 9자이다. 이 비문은 김용거가 撰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20㎝, 너비 44㎝, 두께 14.5㎝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28. 新安 竹連里 錦江井 (신안 죽련리 금강정)
    소 재 지 : 도초면 죽련리 신교마을
    시 대 : 1941년
    종 류 : 생활유적
    유적현황 : 신교마을 중앙의 언덕에 ‘崔炳煥ㆍ金喆善ㆍ池在日 施惠不忘碑’와 함께 위치하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금강정은 “옛 우물이 있었으나 한발과 가뭄에 물이 나오지 않으므로 최병환이 땅을 희사하고 김천선이 160원, 지재일이 90원을 기부하여 우물을 축조하게 되었다.”한다. 건립연대는 1941년이며, 규모는 180×180㎝, 높이 50㎝이다.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상단부는 장대석을 이용하여 그 아래로는 장대석과 다음은 판석형의 석재를 이용하여 결구하였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 『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29. 新安 竹連里 崔炳煥ㆍ金喆善ㆍ池在日不忘碑 (신안 죽련리 최병환ㆍ김철선ㆍ지재일불망비)
    소 재 지 : 도초면 죽련리 신교마을
    시 대 : 1941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신교마을 중앙의 언덕에 ‘錦江井’과 함께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우물의 건립과 관련이 있다. 최병환ㆍ김철선ㆍ지재일은 금강정을 설치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신교마을은 예로부터 식수가 부족하여 주민들이 항상 불편을 감수하였다. 이러한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古井’을 건립하였다. 이 때 최병환은 우물터를 제공하였고, 김철선은 기금 160원, 지재일은 90원을 각각 기부하였다. 이들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1941년에 불망비가 건립되었다. 비 전면에는 ‘五衛將郎州崔炳煥晩香堂彦陽金喆善新軒晴忠州池在日施惠不忘碑’라 새겨져 있다. 비 뒷면에는 우물을 건립하는데 공을 세운 3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7행 21자이며, 金龍擧가 撰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31㎝, 너비 48.5㎝, 18.8㎝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0. 新安 竹連里 金龍擧紀蹟碑 (신안 죽련리 김용거기적비)
    소 재 지 : 도초면 죽련리 신교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이 비는 신교마을 영모사 바로 옆에 있는데 영모사에 배향되어 있는 김용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46년에 세워졌다. 공의 諱는 允永, 자는 士恒이다. 金馹孫의 후예이자 金泰建의 아들이다. 공은 후학들을 가르침에 충효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특히 冠婚喪祭의 예법을 중시하였다. 비 전면에 ‘野隱居士金海金龍擧紀蹟碑’라 새겨져 있다. 비 뒷면에 선생의 이력을 기록한 비문(13행 26자)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金珠亨이 撰하고, 金泰奎가 書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7㎝, 너비 55㎝, 두께 23.2㎝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31. 新安 古蘭里 古蘭埋香碑 (신안 고란리 고란매향비)
    소 재 지 : 도초면 고란리 고란마을
    시 대 : 15세기 중엽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고란리에서 면소재인 수항리로 가는 도로의 밭둑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밭의 중앙에 있었으나, 밭주인이 농사를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비문은 자연석에 글씨를 쓸 수 있도록 표면을 고르게 정리한 다음 구획을 정하여 글씨를 새겼다. 비의 건립 시기는 비의 뒷면에 ‘順天’이라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석문은 6행 11자이며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 할 수 없다. 비의 규모는 높이 96㎝, 너비 46㎝, 두께 15㎝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32. 新安 古蘭里 古蘭保護樹 (신안 고란리 고란보호수)
    소 재 지 : 도초면 고란리 533(고란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노거수ㆍ민속유적
    유적현황 : 고란마을 입구에 1기의 보호수가 있다. 수령은 약 250년이며 높이 14m, 흉고 4.5m의 팽나무로 우산모양의 가지는 여름철 마을주민들이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정월 보름에 도초 고란리 석장승과 함께 당산제를 지내던 당산나무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 『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3. 新安 古蘭里 김현규家屋 (신안 고란리 김현규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고란리 321(고란마을)
    시 대 : 19세기 중엽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고란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다. 안채와 측간채 등을 갖춘 비교적 큰 규모의 가옥으로 건축연대는 19세기 중엽쯤으로 추정된다. 담장은 돌로 축조되어 있으며 가옥은 간좌곤향으로 앉힌 안채와 죽담구조의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앞에 퇴를 둔 5칸 규모의 비교적 큰 슬레이트집으로 2고주 5량 구조이며, 평면구성은 우측으로부터 모방, 정지, 안방 순으로 배치하고 전퇴의 동쪽 단부에는 판벽구조의 고방을 설치하였다. 죽담구조의 헛간채는 입구에 있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34. 都草 古蘭里 古蘭石長栍 (도초 고란리 고란석장승)
    소 재 지 : 도초면 고란리 1631(고란마을)
    시 대 : 1938년
    종 류 : 거석기념물ㆍ민속유적
    유적현황 : 고란마을 입구 ‘장석거리’ 혹은 ‘삼거리’라 부르는 곳에 높이 350cm, 폭 60cm, 두께 35cm의 석장승 1기가 있다. 장승은 화강석 재질로 머리에 30cm 높이의 모자를 쓰고, 몸에 도포형의 긴 옷을 걸친 모습으로 익살스러운 느낌을 준다. 마을의 액과 살을 막아 주민을 보호하는 마을 수호의 기능을 하며, 목장승이 있던 자리에 1938년(장승 뒷면에 ‘乙丑十三年’이라고 새겨져 있다) 석장승으로 바꾸어 세워 현재에까지 이른다.
    장승은 현재 행해지지는 않지만, 정월 보름에 행해지던 고란마을 당제의 하당신의 신체이기도 하였다. 장승 앞에 제물을 진설하고 헌작-재배-구축의 순서로 제를 지냈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35. 新安 古蘭里 高聖權懿蹟碑 (신안 고란리 고성권의적비)
    소 재 지 : 도초면 고란리 고란마을
    시 대 : 1947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이 비는 고란마을 초입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公의 본관은 장흥, 호는 蘭圃이다. 공은 주민들을 구제하는데 늘 앞장섰다. 이러한 공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1947년에 후손들이 의적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嘉善大夫中樞都事五衛將兼同知都事長興高公諱聖權懿蹟碑’라 새겨져 있다. 비 뒷면에는 공의 행적을 기리는 비문 13행 32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은 金龍擧와 李炳觀이 撰하고, 丁斗七이 書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63㎝, 너비 60㎝, 두께 30㎝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36. 新安 古蘭里 高秀柱紀行碑 (신안 고란리 고수주기행비)
    소 재 지 : 도초면 고란리 고란마을
    시 대 : 1959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수항리에서 고란마을로 가는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 고수주의 본관은 장흥이며, 1873년에 태어났으며, 密陽 朴明來의 딸과 혼인하였다. 公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 하였다. 어머니가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공은 아침저녁으로 약을 다려드리며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그러나 끝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하면서 슬퍼하였다. 이러한 공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대동사문회에서 효자로 포상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1959년 9월에 이 비를 세워 기념하였다. 비 전면에는 ‘孝子童蒙敎官高秀柱紀行碑’라고 새겨져있다. 비 뒷면에는 대동사문회에서 공에게 포상한 ‘紀行文’(11행 25)이 새겨져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66㎝, 너비 52㎝, 두께 22㎝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7. 新安 二谷里 二谷上保護樹 (신안 이곡리 이곡상보호수)
    소 재 지 : 도초면 이곡리 709(이곡상리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노거수
    유적현황 : 이곡리 이곡교회에서 우측으로 3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수관이 화려하다. 나무의 규모는 흉고둘레 300㎝, 높이 약 20m이다.
    참고문헌 :

    38. 新安 萬年里 金振五紀行碑 (신안 만년리 김진오기행비)
    소 재 지 : 도초면 만년리 도락마을
    시 대 : 1928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도락마을 앞 나지막한 동산의 북쪽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 ‘嘉善大夫兵曹參判金公振五紀行碑’라 새겨져 있는 이 비는 김진오(金振五)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28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의 규모는 높이 205㎝, 너비 56㎝, 두께 25㎝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39. 新安 萬年里 金海金氏孝烈碑閣 (신안 만년리 김해김씨효열비각)
    소 재 지 : 도초면 만년리 만년마을
    시 대 : 1914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효열각은 도초면 만년마을 비아산 김해김씨 세장산 초입에 위치한다. 김해김씨 효열각은 효자 김권일과 그의 부인 광산김씨, 김권일의 아들 김경재ㆍ김경지와 김경지의 부인 초계최씨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효열비각 맨 앞에 김경재의 비가 서있고, 뒤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2기의 비각이 나란히 서있다.
    맨 앞에 있는 김경재의 비는 앞면에 ‘資憲大夫金公璟在紀念碑’(높이 166㎝, 너비 55㎝, 두께 23.5㎝)라고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대동사문회에서 공의 행적을 칭송한 포상내용이 새겨져 있다. 김경재는 김권일의 둘째아들이다. 뒤편으로 올라가 오른쪽에 위치한 것은 효자 김권일과 부인 광산김씨의 효열비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석조비각안에 ‘孝子朝奉大夫童蒙敎官兼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嘉善大夫工曹參判金海金權一之閭’(높이 120.5㎝, 너비 43.4㎝, 두께 15.7㎝), ‘貞夫人光山金氏之閭’(높이 117㎝, 너비 43.3㎝, 두께 17㎝) 두기의 비가 나란히 서있다. 두기의 비 모두 1914년에 건립된 것으로, 효행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왼쪽에 위치한 것은 김권일의 셋째아들 김경지와 그의 부인 초계최씨의 효열비각으로 정면,측면 각 1칸의 비각 안에 두기의 비가 나란히 서있다. ‘孝子嘉善大夫戶曹參判金海金璟趾閭’(높이 113㎝, 너비 39㎝, 두께 15.3㎝)와 ‘貞夫人草溪崔氏之閭’(높이 109㎝, 너비 42.1㎝, 두께 13.6㎝)로 부부의 효열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40. 萬年寺 (만년사)
    소 재 지 : 도초면 만년리 산50(만년마을)
    시 대 : 1948년
    종 류 : 불교건축
    유적현황 : 만년마을 남동쪽의 용당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조계종에 속하는 만년사는 1948년 문귀녀 여사가 서른아홉 되던 해에 길을 지나던 한 노인이 문귀녀 여사에게 이르기를 “산새로 보아 이 터에 절을 지으면 만년동안 번영할 수 있고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후 이 노인의 예언에 따라 그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만년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지 400평에 건평 45평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이 들어서 있다. 대웅전 앞에는 1948년 5월 5일 조동부의 시주로 和尙 釋淸潭이 조성한 2기의 석등이 세워져 있으며, 절 입구에는 문귀녀 여사의 기념비를 비롯된 여러 기의 공덕비가 위치하고 있다. 근년에 흙속에서 혜각스님이 파냈다는 신기한 목불은 좌상득도의 혜안으로 근처 야산에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41. 新安 萬年里 大邱裵氏烈行碑 (신안 만년리 대구배씨열행비)
    소 재 지 : 도초면 만년리 한발마을
    시 대 : 1929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한발마을 입구의 길가에 세워져있다. 배씨부인은 裵成化의 딸로 태어나, 장성하여서 參議公 高瑞柱와 혼인하였다. 부인의 성품은 정숙하고 시부모님을 정성을 다하여 공양하였으며, 남편을 섬기고 아이를 기르는데 있어서 모범이 되어 고씨문중에서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殉從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부인은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의 묘역에서 지냈다. 이러한 배씨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29년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비의 전면에 ‘貞夫人大邱裵氏烈行碑’라 새겨져있고, 비 뒷면에 부인의 열행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15행 23자이다. 규모는 높이 148㎝, 너비 45㎝, 두께 18㎝이다. 비의 주변에 시멘트 담장이 둘러져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42. 新安 萬年里 金海金氏紀行碑 (신안 만년리 김해김씨기행비)
    소 재 지 : 도초면 만년리 한발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한발마을 입구의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 김해김씨는 文愍公 金馹孫의 후예이다. 사헌부 감찰 金洙烈의 딸로 태어나, 성장하여서 김성옥과 혼인하였다. 그런데 나이 28살에 남편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나 끝내 남편은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이후 김씨부인은 어린아이의 양육과 시어머니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김씨 부인의 열행사실이 경성 慕聖會에 알려졌다. 이에 김씨문중에서 기부금을 모아 부인의 열행비를 1946년에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節婦金海金氏紀行碑’라 새겨져 있고, 비 뒷면에 金容銓이 撰한 10행 30자의 비문이 새겨져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150㎝, 너비 49.7㎝, 두께 21㎝이다. 비 주위에 시멘트 담장이 둘러져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43. 新安 水多里 장신엽家屋 (신안 수다리 장신엽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수다리 382(용동마을)
    시 대 : 194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장신엽가옥은 용동회관에서 남동방향으로 50m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다. 건축연대는 1940년경이다. 평면구조는 좌로부터 마래ㆍ대청ㆍ안방ㆍ정지ㆍ모방 순으로 배치되었다. 모방이 다른 가옥에 비해 다소 크다. 이 가옥의 특징은 모방이 정지 안쪽으로 반쯤 침투되어 있어 완전한 ‘一’자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정지공간이 축소되는 반면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가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44. 新安 水多里 小龍洞空家 (신안 수다리 소용동공가)
    소 재 지 : 도초면 수다리 60(소용동마을)
    시 대 : 192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용동마을을 지나 소용동마을로 들어서는 초입부에 서너채의 가옥이 있는데 그중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는 가옥이다. 건립연도는 1920년경이다. 모방이 정지 우측면에 배치된 ‘一’자형 가옥으로 평면형태는 좌로부터 모방, 정지, 안방, 마래가 배치된 단순한 평면구조이다. 모방이 정지 전면 쪽에 있지 않고 측면에 가는 형식이다. 모방이 상당히 독립적이고 출입을 전면 툇마루를 통하게 되어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45. 新安 水多里 최매실家屋(신안 수다리 최매실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수다리 111(소용동마을)
    시 대 : 1930년대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최매실 가옥은 소용동마을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건축연대는 1930년경이다. 모방 옆에 1칸의 소청이 설치되어 있으며, 마래 옆으로 긴 고방이 있다. 평면 형태는 좌로부터 고방, 마래, 안방, 정지, 모방, 소청을 배치한 일자형 구조이다. 모방이 정지 전면 쪽에 있지 않고 측면에 가는 형식이다. 모방이 상당히 독립적이고 출입을 전면 툇마루를 통하게 되어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46. 新安 水多里 水多保護樹 (신안 수다리 수다보호수)
    소 재 지 : 도초면 수다리 산52-3(수다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노거수
    유적현황 : 나포마을에서 수다마을로 들어서는 초입부에 위치한다. 보호수는 산사면 끝자락에 있다. 수종은 팽나무이며 수관이 화려하다. 크기는 둘레 270㎝, 높이 15m 정도이다.
    참고문헌 :

    47. 新安 水多里 문영순家屋 (신안 수다리 문영순가옥)
    소 재 지 : 도초면 수다리 1103(나포마을)
    시 대 : 1940년경
    종 류 : 주거건축
    유적현황 : 화도선착장에서 화도방조장 위로 난 도로를 따라 1.5㎞정도 가다보면 수다리 나포마을이 무명산(해발 100.8m) 아래에 형성되어 있다. 가옥은 화도선착장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부에 위치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1940년경이다. 평면형태는 좌로부터 마래․대청․안방․정지․모방을 배치한 일자형 평면구조이다. 모방이 완전히 정지 안쪽으로 들어선‘一’자형 가옥으로 마래와 안방사이 대청이 배치된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평면형태는 서남해 도서지방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현재는 작년에 지붕을 수리하여 약간 변형되어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48. 新安 水多里 尹相裕紀念碑 (신안 수다리 윤상유기념비)
    소 재 지 : 도초면 수다리 나포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나포마을 삼거리의 파평윤씨 선산자락에 있다. 공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충정공 윤발의 후예로, 1894년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총명하였으며, 『소학』의 가르침을 행하고 실천하였다. 특히 공은 부모를 섬기고 공경함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경제가 어려운 이웃에게 덕을 베풀었다. 이러한 공의 선행을 기념하기 위해 1946년에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 ‘筠軒尹居士善行紀念碑’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 17행 36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은 이회문이 撰하고, 임철주가 書하였다. 비의 규모는 높이 149㎝, 너비 51㎝, 두께 21.5㎝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49. 新安 水多里 昌寧曺氏旌閭閣 (신안 수다리 창녕조씨정려각)
    소 재 지 : 도초면 수다리 나포마을
    시 대 : 1949년
    종 류 : 유교건축
    유적현황 : 나포마을은 민가가 2군데로 나뉘어 분포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수다마을에 가까운 황홍기씨 댁 앞에 위치하고 있다. 창녕조씨는 통정대부 윤광평의 처로 남편이 20세에 병을 얻자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으나, 남편이 죽고, 겁탈을 당하려 하자 도망하여 절의를 지켰다. 또한 베를 짜서 홀로된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고,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냈다. 이에 조씨를 기념하기 위해 1949년에 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전면에는 ‘烈女淑人昌寧曺氏之閭’라 새겨져 있으며, 규모는 높이 150㎝, 너비 42㎝, 두께 15㎝이다. 비각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다. 비각의 주변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여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50. 新安 水多里 鄭寅培紀念碑 (신안 수다리 정인배기념비)
    소 재 지 : 도초면 수다리 매실마을
    시 대 : 1946년
    종 류 : 비갈
    유적현황 : 매실마을은 북쪽으로 대성염전과 남쪽으로 매실염전이 넓게 형성된 소규모마을이다. 비는 나포마을에서 매실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정인배는 염전을 조성할 때 도움을 준 尹善玉, 崔君明, 尹公用, 朴月順, 崔德守, 朴長突, 尹相甫, 尹春守, 尹有旻, 尹今突 등에게 1만평의 염전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염전을 받은 윤선옥 외 9인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46년에 비를 세웠다. 비의 전면에는 ‘惠齊鄭公寅培氏紀念碑’라 새겨져 있다. 규모는 높이 200㎝, 너비 51㎝, 두께 20㎝이다. 현재는 원래 있던 자리의 맞은편 길가로 이동되어 있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박물관 2004, 『신안군 도초면 지방상수도시설 사업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51. 新安 牛耳島貝塚 (신안 우이도패총)
    소 재 지 : 도초면 우이도 돈목마을
    시 대 : 신석기
    종 류 : 패총
    유적현황 : 이 패총은 우이도 서남부에 위치한 돈목마을에서 남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구릉의 남사면에 위치한다. 패총의 정면(남쪽)에는 폭70~80㎝ 정도의 소규모 백사장이 형성되어 있고 삼면이 해안단애와 소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어 주거환경으로 비교적 양호한 지역이다. 지표에서 관찰되는 패각의 산재범위는 20~30m정도이다. 패각의 혼입은 많지 않은 편이며, 대부분 굴이다. 시굴갱에서 확인된 층위는 표토 15~20㎝, 패층 15~20㎝, 점토층 10㎝이다. 기존의 시굴조사과정에서 조사된 유물은 빗살무늬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는 염소방목장으로 일부가 이용되고 있고, 패각이 많이 훼손되었으며 토기편도 확인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 김원룡ㆍ임효재 1968,『남해도서고고학』,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52. 新安 牛耳里 서리堂祭 (신안 우이리 서리제당)
    소 재 지 : 도초면 우이리 서리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서리마을에서는 상당제-중당제-하당제-쥐당제-갯제의 순으로 매년 정월 3일에 당제가 행해진다. 옛날에는 마을 뒤산에 제당이 있었으나 당제를 지낼 때마다 금줄의 吉紙가 동편의 안산에 날아가 떨어지므로 신의(神意)가 있다고 생각하여 안산을 영지(靈地)로 보고 당을 옮겼다. 상당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두 노송의 제단이 있고, 50m 아래 팽나무의 중당제단이 있는데 아들과 며느리를 모시고 있다. 중당에는 20m 아래에 암석 하당이 있는데 장가를 못 들고 죽은 몽달귀신을 모시고 있다. 쥐당은 마을 한 가운데 있으며, 가로 80cm, 세로 60cm 정도의 입석제단이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53. 孤雲 崔致遠遺蹟地 (고운 최치원유적지)
    소 재 지 : 도초면 우이도리 산144-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종 류 : 전설유적
    유적현황 : 우이도는 도초면에서 흑산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신라말기 진성여왕(887~897)때의 학자 고운 최치원선생이 중국으로 유학 가던 중 우이도 상산에 도착했다. 때마침 우이도에는 가뭄이 극심하였는데 고운 선생을 본 주민들은 가뭄을 물리치고 비를 내려주도록 간청했다. 이에 선생은 즉시 북해 용왕을 불러 가뭄을 해결하라고 했으나, 옥황상제의 명령이 아니면 용왕 마음대로 비를 내릴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용왕의 말을 듣고 고운 선생은 화를 벌컥 내면서 속히 비를 내리라고 호령했다. 기가 꺾인 용왕은 하는 수 없이 고운 선생의 명령대로 비를 대려 가뭄을 해결했다.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내며 용왕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고운선생은 용왕을 도마뱀으로 만들어 선생의 무릎 밑에 감추어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 후 선생은 중국으로 떠났는데 선생이 머물면서 상산봉 제2봉에 있는 바위에다 바둑판을 만들어 바둑을 두면서 즐겼고, 이러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철마와 은접시를 유물로 놓아두고 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러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참고문헌 : 신안군 2006,『우리고장의 향토문화유적』.

    54. 新安 牛耳里 黑山鎭址 (신안 우이리 흑산진지)
    소 재 지 : 도초면 우이리 진리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군영
    유적개요 : 흑산진은 조선후기에 흑산도 진리와 가거도, 그리고 우이도 진리에 설치되었던 수군 별장진이다. 흑산진의 창설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전하는 문헌기록에 의하면 1665년(현종 6)에 설진논의가 있었으나, 창설되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에 간행된『여지도서』에 흑산진이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665년~1759년 어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세기 말엽에 간행된『대동지지』에 의하면, 흑산진의 위치가 기술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에 따르면 ‘흑산진은 우이도에 있다. 설진초기에 별장을 두었다. 수군만호 1명이 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흑산진이 설치되었던 곳은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木浦大學校博物館 1987,『新安郡의 文化遺蹟』.

    55. 新安 牛耳里 船所 (신안 우이리 선소)
    소 재 지 : 도초면 우이리 진리마을
    시 대 : 조선
    종 류 : 군영
    유적개요 : 선소는 진리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산의 경사면을 뒷면으로 타원형 모양을 하고 있다. 입구는 바다쪽이 아니라 마을 쪽으로 엇갈린 형태이다. 규모는 마을길과 인접한 제방이 길이 63.3m, 너비 1.6m, 높이 2.2~3m 이며, 맞은편 제방은 길이 6.8m, 너비 1.6m, 높이 3m 정도이다. 한편 선소로부터 북쪽으로 5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비1기가 세워져 있다. 규모는 높이 96cm, 너비 39~47cm, 두께 10cm 이다.
    참고문헌 :

    56. 新安 牛耳里 鎭里祭堂 (신안 우이리 진리제당)
    소 재 지 : 도초면 우이리 진리마을
    시 대 : 미상
    종 류 : 민속유적
    유적개요 : 진리당제는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부터 정월 3일까지 행해진다. 음력 섣달 그믐에 상당에서 3일간 제를 지내고, 정월 2일에 하당과 쥐당에서 제를 지내고, 3일에 내려와 바닷가 모래사장 ‘장굴’에서 용왕제를 지낸다. 마을 위쪽의 ‘당등’에 상당과 하당 두 채의 당집이 있다. 각각 기와지붕으로 된 한 칸짜리 집으로, 상당에서는 ‘당할아버지’와 ‘당할머니’를 함께 모시고 제를 지내며, 하당에서는 당제를 지내는데 필요한 음식을 장만한다. 쥐를 없애달라는 제사를 지내는 ‘쥐당’은 큰 고목나무 뒤에 있는 절벽바위 밑에 있고, 용왕제는 마을 앞 바닷가에서 지낸다.
    참고문헌 :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2005,『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4 -도초면 편-』.

    57. 新安 牛耳里 風成砂丘 (신안 우이리 풍성사구)
    ○ 소재지 : 도초면 우이리
    ○ 시 대 : 미상
    ○ 종 류 : 자연유산
    ○ 유적개요 : 풍성사구는 우이도의 서쪽 해안가에 자리한 돈목해수욕장의 서쪽에 형성되어 있다. 산릉사이의 안부(고개)를 통과하는 바람(특히 동계 계절풍)에 의해 사구사가 산릉의 정상부까지 이동되어 형성된 사구로, 세립사로 구성된 풍성퇴적층으로서 해발 약50m까지 이르는 퇴적층의 높이는 우리나라 최대규모로 생각되어진다. 가장 높게 발달한 대사구는 섬의 북서부 성촌해빈과 서부의 돈목해빈 사이의 언덕을 바람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피복하는 형태로 발달하여 있다. 계절별 사구사의 이동과 그에 따른 지형변화의 과정이 다른 해안지역에 비하여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며, 성촌해빈 뒤쪽의 전사구 퇴적층은 해안사구 퇴적층의 발달 및 천이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학술적 가치 외에도 대규모 모래 지형이 만들어낸 경관의 아름다움은 풍성사구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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